양 극단의 경험을 피하기
지독한 가난과 분에 넘치는 풍요로움
극한의 고통과 세상사를 잊는 환희
양 극단의 경험을 나열한 것이다. 가난과 풍요로움, 고통과 환희......
둘 중 무엇이 더 나은 것일까?
이들 중에하나를 경험해야 한다면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나는 어느 것도 선택하고 싶지 않다.
나는 우선 숨이 막히는 금전적 결핍과 육체적 고통을 겪고 싶지 않다. 돈이 없어 양질의 음식을 먹지 못하고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에 고통에 시달리는 게 싫다. 그렇다고 써도 써도 줄지 않는 금전적인 여유와 세상사를 잊을 정도의 안일함을 사양한다.(어차피 그럴 일은 없다.)
경험은 삶을 지배한다.
이렇게 양 극단의 삶을 사양하는 이유는 경험이 단순히 경험에 끝나지 않고 나머지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지독한 가난과 고통은 세상을 부정적으로 볼 가능성을 높게 만든다. 반면에 과도한 풍요로움과 환희는 세상을 과도하게 낙관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즉, 어느 것을 선택해도 세상을 편협하게 생각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후배가 있다. 그는 극도로 북한을 증오한다. 30대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태극기 든 노인의 증오심과 다르지 않다. 오히려 더 논리정연하게 배척한다. 알고 보니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당시 연평도에서 중대장을 맡고 있었다. 그 전장에서 두 명의 부하가 전사하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다. 그 극도의 상황이 북한에 대한 증오심을 폭발시켰다. 후배가 그런 경험을 하지 않았다면 이 정도의 강한 적개심을 보일 수 있었을까?
이런 면에서 태극기를 들고 노니는 노인들을 충분히 이해하게 된다. 그들은 6.25을 경험했거나 6.25로 인한 피해를 직접적으로 경험한 세대들이다. 그 이후 북의 수많은 도발을 경험했다. 그들의 경험에 근거한 합리적인 판단으로는 북한은 절대악이다. 절대적으로 파괴해야 될 대상이지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 그런 그들의 눈에 지금 최근 정부의 정책은 대한민국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매우 위협적인 행동이 될 것이다. 그들이 나라를 구한다고 나서는 건 합리적인 행동이다.
반면에 조선시대 중기 선조와 조정은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가까운 시일에 발생이 예상되는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10만 명의 군인을 양성하는 계책을 거부했다. 이유는 '평화로운 시대에 불필요한 평지풍파를 일으키느냐' 라는 논리였다. 이로 인해 조선은 전쟁에 대비할 최후의 기회를 놓쳤다. 그 당시 사람들도 이해가 간다. 그 당시 조선은 약 200년간의 평화 시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 환경에서 생활한 사람들은 이이의 제안에 크게 당황했을 것이다. 힘들게 일을 키우려는 이이를 이해 못했을 것이다. 이는 미래도 평화로울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론이 만들어 낸 결과이다.
극단의 상황을 경험한 사람은 편협한 시각을 갖는다.
한쪽 면만 경험한 사람은 그만큼 시야가 좁아질 수 밖에 없다. 인간은 경험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대한 양 극단의 경험은 피하는 게 좋다. 물론 피하는 게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다. 태어나서 수십 년의 시간은 자기 의지와 관계없이 특정상황을 경험한다. 명리학에서 초년운은 자기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했다. 즉, 가정환경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 결국 성인이 되어 독립체가 된다 해도 실질적인 독립체가 아니다. 내면은 과거의 경험과 기억에 종속되어 있다. 결국 십중팔구 과거를, 쉽게 말하면 부모를 따라간다.
자신의 경험만으로 바라보고 해석하기에, 세상은 너무나 복잡하고 계속 변한다.
문제는 편협한 시각을 가진 한 개인이 바라보고 해석하기에 세상이 너무나 복잡하고 지속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 개인의 경험은 한정적이다. 시간도 한정적이다. 환경은 내가 바꿀 수 없다. 그만큼 개인의 시야는 크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반면에 세상은 너무나 다양한 사람과 요소로 구성된다. 그리고 계속 빠르게 변한다. 미약한 개인이 세상에서 사실을 넘어 진실에 다가가기 건 너무나 벅찬 일이다.
우선 양극단의 경험은 최대한 완화해야 한다.
우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시도는 양 극단의 경험을 될 수 있으면 완화시키는 것이다. 자신의 경험이 극단에 해당되는지 아닌지 확인이 먼저이다. 그리고 새로운 경험을 시도해야 한다. 자신의 기존 환경과 다른 경험 말이다. 또 다른 세상, 또 다른 시야, 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을 좀 더 균형적으로 볼 수 있고 현상을 ‘억지로’ 해석하지 않는다. 좀 더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다.